소멸가능한 진기珍奇:

중국인의 시선에서 바라 본 신미경의 작품

 

두안쥔

 

한국과 중국은 지리적으로 매우 근접하여 예로부터 문화교류가 활발하였으며 수묵과 도자기 등의 예술 분야는 유사하게 발전한 부분이 많다. 중국인은 옛 의미가 새겨진 작품을 숭상하곤 하기에 신미경의 작품은 얼핏 비슷한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예술 언어와 사용된 재료 속에 숨은 작품의 핵심은 관념적이다. 작가가 만들어내는 조각상과 도자기는 너무나 정교하기에 이 모든 작품들이 비누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만약 관람객들이 작가가 만들어낸 조각의 모습이 화장실에서 끊임없이 만져지고 사용되어 변화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녀의 작품에 더욱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중국인들에게 불상은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신성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미경이 런던에서 진행했던 <화장실 프로젝트>는 지리적•문화적 감수성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런던 사람들에게 불교의 조각상은 신성시함이 덜하고, 금기하는 부분도 많지 않다. 화장실에 비치된 비누로 만든 동양의 불상과 서양의 고전 조각상은 이들에게 색다른 형태의 비누일 뿐, 손 씻기에 사용되는 일상용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손 씻기가 계속되면서 조각의 머리 부분은 평평해지고, 얼굴은 닳아 없어져 자연스럽게 형태의 변화가 일어났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주관이 조각의 외형을 결정짓는 것에 반해 신미경은 그 권리를 작품과 조우한 사람들에게 넘겨주었다. 작가는 변형된 결과물에 특정한 규칙을 정하거나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다양한 작가들이 관람객 참여형 작품을 선보인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서 말하는 ‘참여’가 제작 과정에까지 적극적인 참여를 요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신미경은 <화장실 프로젝트>에서 조각의 변형에 관련된 행위의 모든 권리를 관람객에게 넘겨주었다. 관람객은 ‘예술 창작’이라는 심오한 목적을 가지고 작품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대신 만지고 사용하면 되었다. 관람객의 사회적 속성이나 계층 간의 언어가 작품의 완성에 개입될 가능성이 광범위하게 배제된 채 작품은 자연스럽게 완성되었다.

 

비누 조각의 출발은 작가가 처음 런던에 정착하던 시절 고전 조각상의 실물을 보고 느낀 바를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중국 사람들도 이러한 작가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사에서만 접하던 서양의 고전 조각상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다양한 감정과 심리적 반응들... 작가에게 고전조각상은 단순히 역사적 예술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작품 창작의 촉매였다. 신미경이 고전 조각상으로부터 받은 개인적이면서도 독특한 인상은 대리석과 재질이 유사한 비누, 생활용품으로서의 비누, 쉽게 여성작가를 연상시키는 재료로서의 비누, 단단한 대리석과 상반되는 소모품인 비누라는 고민을 하도록 이끌었다.

 

20세기 독일의 저명한 실존철학가 하이데거는 “예술품과 일용품의 차이란 일용품은 소모하기 위한 것이고, 예술품은 사용하더라도 절대 소모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신미경은 비누 조각을 화장실에 비치하고, 편의시설을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만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이 조각들이 미술관의 전시장으로 들어온 뒤에는 만지거나 사용이 불가능해진다. 작가는 이것에 착안하여 “만약 예술품의 재질이 일상에서 소모되는 생활용품이라면, 이 예술품이 가지고 있는 성질도 소모되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사실 신미경의 작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멸될 수 있기에 그녀가 선택한 비누라는 재료를 걱정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작가라면 당연히 자신의 작품이 유방백세 하기를 바라니 그들의 걱정은 납득할만하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이 소리도 소문도 없이 불멸의 존재로 남아 있는 것보다는 물리적으로 수명이 짧다 하더라도 좀 더 심화된 차원에서 관객들과 교감하며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이것이 작품으로서 더욱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마치 찰나의 시간에 사라지기는 하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되는 찬란한 불꽃놀이처럼 말이다. 왜 우리는 끈질기게 작품의 영원에 집착하는가? 불교나 동시대 미술은 모두 물질 형태의 영원을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처럼 예술이 세상을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필히 외형의 변화나 물질의유동적 움직임을 포착하고 그 모습을 표현해야 한다. 파손되고, 결함이 있고, 노후되고, 병들은 모습과 같은 불완전한 상태를 애써 감출 필요는 없다.

 

신미경은 실수로 눌려진듯한 찌그러진 브론즈도 제작했다. 중국 속담에 “모로 쳐도 바로 맞는다(歪打正着)”라는 말이 있다. 한 가마에서 구워낸 동일한 모양의여러 도자기 중 착오가 발생하여 뜻밖에 좋은 도자기를 얻은 것처럼 작가는 ‘쓰러져가는 아이콘’을 만들었다. 신미경은 브론즈의 외형에 변화를 주면서 ‘쓰러져가는 아이콘’의 형태를 유지했다. 견고한 브론즈는 더 이상 곧게 설 수 없겠지만, 관람객은 이 작품을 통해 브론즈가 지니고 있는 재질의 특징과 브론즈의 상징 사이에 은유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쓰러져가는 아이콘’은 시간이나 권력 등 역사적•사회적 다양한 요인들이 사물에 미치는 영향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조각상이든 브론즈든 신미경의 작품은 우리가 유물에서 보았던 완벽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예술형식의 파괴는 동시대 미술의 관행으로 깊게 자리 잡았다. 이것은 불공평하고 억압당하는 현실의 삶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인 것이다. 비록 오늘의 작가들이 완벽하고 고전적인 예술품의 제작을 갈망할지도 모르겠으나 이들이 생활에서 겪게 되는 일들은 ‘전체론적이고 완벽한 세계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해외에서 거주하고 작업하는 많은 중국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신미경 역시 자신의 정체성에 민감하며 이와 관련된 의문들을 작업의 쟁점으로 삼는다. 다양하게 존재하는 문화적 경계들을 넘나들며 문화적 맥락에서의 갈등과 그에 동반되는 아이디어를 공유함으로써 신미경의 작품세계는 더욱 풍부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신미경의 중국 전시가 이전의 전시들과 마찬가지로 국제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가 중국 미술계에 새로운 정취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작가 개인의 작품 활동에 있어서도 새로운 바탕이 되길 바란다.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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