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되어진 문화 – 신미경의 조각

 

제임스 푸트넘

 “철학은 번역 혹은 번역가능성의 논제에 그 근원을 둔다.”

(자끄 데리다, ‘타인의 귀’ 1982, 120쪽)

 

신미경 작가의 연작 프로젝트 “트랜스레이션”은 시공간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각기 다른 문화 속에서 사물의 형태와 의미가 변형되고 다시금 기호화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하여 형태, 장식적 모티브 그리고 종교적인 도상들이 문화의 교류를 통해 변형되는 모습에 주목한다. 고대 고전 조각들과 동양의 도자기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비누 버전으로 제작한 그녀의 작업은 동양과 서양, 이 두 문화의 “번역” 과정과 연관 지을 수 있다. 즉, 그녀는 이 양 문화간의 교류가 각 문화를 영위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미학적으로 감상될 수 있는지를 파고든다.실상 번역이란 단순한 언어적 행위가 아니다. 번역은 한 문화에서 제시된 표현들이 국가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 이동할 때 자연스레 발생하는 의미의 상실이나 이해의 문제들과 연계된 과정 전체를 일컫는다. 따라서 언어를 번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물이 한 대륙에서 또 다른 대륙으로 이동될 때에 해당 문화에 대한 지식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신미경작가의 “트랜스레이션” 프로젝트는 항아리나 조각과 같은 작품들이 기존의 세팅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환경으로 이동되었을 때, 전혀 “새로운” 작품이 될 수 있는가 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 이는 마치 미술관이 장소의 이동이라는 행위를 통해 과거 실용적, 종교적인 기능을 지녔던 유물들을 역사적이고 심미적으로 중요성을 지닌 ‘비실용적’ 문화재로 변모시키는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것이다. 작가는 이때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번역의 산물을 제시한다. 우선 그녀는 박물관이나 개인소장품인 작품들을 비누로 똑같이 재현한다. 그리고 이를 완전히 다른 문화적, 종교적인 환경하에 놓는다. 자신의 작품을 새로운 문맥 하에 재배치 함으로써 각각의 다른 배경의 관객들에게 이 작품들을 재해석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때 작품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과 평가는 그들 개개인이 처한 환경과 장소, 역사적인 배경지식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연유로 번역은 단순한 번역자의 언어 변환 테크닉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점차 국경이 없어져가는 예술영역에 있어 각 문화들간의 상호교류를 통해 보여지는 문화적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다문화 현상 속에서 문화적 경계는 점차 희미해지고, 독창성 내지는 개별적인 특성들은 변모되거나 사라졌다. 예술가들 또한 스스로가 보다 유목민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면서 그들의 국가적, 문화적 정체성은 하나의 그 무엇으로 규정지을 수 없게 되었다. 15년이 넘게 서울과 런던을 오가며 작업하는 작가 신미경은 단일한 국가적, 문화적 정체성을 정의 내리지 않는 혼성문화 속에서 작업해오며 다문화를 몸소 실천해 온 작가이다.그녀는 젊은시절 유럽미술관을 방문하여 그리스 고전조각과 로마네스크 조각들을 처음으로 실제로 접하게 되었다 한다. 이때 그녀는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나 심미적인 부분에 있어서 강한 소외감과 이질감을 갖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녀의 작업에 있어 주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초기 “번역”작업은 미술관에 소장된 일련의 그리스, 로마시대의 대리석 조각들을 비누조각을 제작하여 선보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조각을 제작하면서 고대 작품의 포즈에 본인의 몸과 얼굴모양을 넣기도 하고 또한 그 작품에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품에서처럼 다양한 색을 넣어 제작하기도 했다. 이 작품들은2004년에 대영박물관의 Great Court에 전시되었는데, 전시와 더불어 관객들이 작가의 제작과정을 관람할 수 있는 현장 퍼포먼스도 함께 선보였다. 최근에 들어서서 작가는 그리스 로마 조각들에서 동양의 도자기들을 비누로 제작하는 데로 관심을 돌려 마치 이 도자기들이 역사박물관에 있었던 것처럼 기관이나 상업갤러리에서 전시하였다. 이때 많은 동양의 도자기들 중에서 작가는 특별히 고대 중국의 도자기를 비누작업의 소재로 선택했는데, 이들은 유럽이나 미국으로 수출하기 위해서 특수 제작된 장식적인 작품들이었다. 도자기를 일컫는 ‘차이나’라는 명칭의 기원은 중국 도자기가 유럽에 소개되면서 부터 비롯되었다. 이 시기 중국 도자기는 유럽인들에게 매우 희귀하고 값비싼 것으로 간주되었다. 과거 중국에 대한 먼 거리감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이국적이고 이상적인 형태로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게 하였고, 이러한 인식은 중국문화를 장식적인 디자인과 모티브의 형식으로 서양인들에게 ‘번역’ 되어지게 되었다. 18, 19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수출된 도자기들은 서구인들에게는 중국문화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도자기들은 일반 대부분의 중국인들에게서는 한번도 사용 된 적도, 심지어 선보여진 적도 없었다.  오히려 화상들이나 무역상들이 서구인들의 입맛에 딱 맞는 이러한 종류의 장식적인 도자기들을 공급하면서 중국에 대한 환상과 잘못된 인식을 부추긴 셈이다.

 

신미경 작가의 프로젝트에서 이러한 수출 도자기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문화적 산물인 도자기가 “재배치” 과정을 통해서 잘못된 해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유사 중국양식이라 불리는”chinoiserie” 또한 19세기 유럽의 장식미술에서 비서구적인 형태, 장식적인 모티브 들로 표현되며 많이 선보여졌다 “번역” 프로젝트를 함에 있어 신작가는 작품 자체 뿐 아니라 작품의 설치와 전시의 방법을 통해서도 도자기 항아리들이 ‘번역’된 것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즉, 그녀는 기존의 항아리 전시에 이용되는 상용 받침대 대신에 특수 제작된 포장용 상자를 이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항아리를 반사 광택의 스틸 판재 위에 올려놓기도 한다. 이때 도자기들의 받침대에 붙여진 운송 라벨들은 이 작품들이 한 장소에서 다른장소로 이동되면서 새로운 맥락을 형성하고 또한 ‘번역’되어짐으로써 그 작품의 이동기록을 만들어 낸다. 또한 작가는 고대중국과 한국의 다양한 형태의 전통 도자기 모양을 실험했는데, 이들중 일부는 장식문양이 없이 단색조의 파스텔 컬러들로 제작되어 색다른 조합과 배치를 선보이며 전시되었다. 세부 묘사에 대한 작가의 열정과 고도의 숙련된 완성도를 통해 탄생한 비누조각들은 백자, 청자 그리고 나아가 유리도자기에 이르기까지 원본에 대한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작품 자체 내에서 균형적인 리듬과 비례가 함께 이뤄지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2007년에 대영박물관에서 있었던 전시는 이러한 사실의 좋은 예가 된다.당시 한국백자 ‘달항아리’ 전에서 작가는 그녀의 조각재료인 비누를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했다. 이때 그녀는 비누 고유의 성질들이 자신의 번역에 대한 입장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생각했다. 즉, 브론즈나 돌과 같은 일련의 견고성과 영속성을 상징하는 조각재료들과는 달리 비누의 가변성은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작가에게 있어 잘 변하는 비누의 성질은 한때 불변하는 것이라 간주되던 문화에 대한 생각에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고 또한 부드러움과 무른 성질은 전통적으로 ‘남성적’인 재료로 상징되던 조각재료들에 대한 페미니스트적인 입장을 취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비누라는 대상은 우리가 밤낮으로 사용하면서 삶을 측정하는 척도로 사용되어왔다. 또한 우리의 살갖과 직접적으로 맞닿으면서 다른 조각재료가 갖지 못한 친밀함을 가져다 주었다. 비누는 사용함에 따라 닳고 마침내는 사라져버린다. 이러한 특성은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데, 작가는 이러한 성질 속에서 방랑자적이고 영구적 거처가 없는 자신의 삶의 형태를 반추한다. 또한 비누는 향을 지님으로써 다른 시간과 공간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적인 속성을 갖는다. 이처럼 일상적이고 평범한 재료를 선택한 작가의 태도는 한편으로 이탈리아의 예술운동 아르테 포베라와 닮았다. 아르테 포베라운동은 기존의 고급예술운동에 반기를 들고 나온 예술 사조로서 많은 예술작품들이 값싸고 대중적인 소재로 제작되었다. 일반 금속들을 금으로 만들어 내는 연금술사와도 같이 작가 신미경은 이러한 평범한 재료들을 값진 그 무엇으로 변형, 아니 ‘번역’한다.한편, 비누는 일반적으로 깨끗함을 상징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작가의 번역- 화장실 프로젝트는 그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작가는 공공미술기관과 박물관 화장실 안에 비누로 만들어진 불상을 가져다 놓고 일반인들에게 사용케 함으로써 비누조각이 닳아 없어지게끔 유도한다. 그리고 일정기간이 지난 후 마치 역사적 유물마냥 갤러리들에 전시한다. 이때 관람객들은 이 프로젝트의 가장 주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즉, 작품을 완성시키고, 작품 각각의 출처를 만들어 낸다. 이점이 바로 실제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과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화장실 프로젝트의 비누작품과는 달리 유물은 한때는 일상에서 쉽게 사용되어졌던 기능적인 사물이었다가 만져지면 안 되는 보존 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번역’ 작업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 작가 신미경은 끊임없이 번역 작업을 행하는 이유에 대해 그것이 바로 자신이 만들어내는 작품의 고유한 성질이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언어로 작품 뒤에 감추어진 가장 근원적인 의미를 유추해 낼 필요에 따른 것이라 이야기 한다. 이때 번역작업은 원본의 형태와 그것에 대한 해석이라는 상관관계에 주목하는데, 작가는 여기서 진품에 대한 논의, 고유성, 복제 등등의 이슈들을 통해 작품과 관객과의 비판적인 접점을 찾고자 한다. 

 

오늘날 형태인식기술을 통해서 기계적으로 3차원 대상을 원본과 똑같이 복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신미경 작가의 섬세한 수공적 기법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은 작가 스스로가 이야기하듯이 원본에 대한 유령이라 말할 수 있는 복제라기 보다는 원본에 대한 대리 품에 가깝다. 로마인들은 한때 그리스 조각 상들을 모사하면서 원본과 똑같은 완벽한 형태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 조각의 원본과 똑같이 완벽한 형태의 조각상을 만들어냄으로써 그리스인들이 가졌던 미적 역량을 함께 가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작품들은 그리스 시대의 원본을 능가하는 미학적 아름다움을 지녔다 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술작품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기원이나 문화적인 측면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히 미적 감각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은 이를 넘어서서 대중들에게 통용되는 문화적 관습들과 동시에 각 개개인의 성향과 그들이 느끼는 개별적인 생각들을 표현하고 드러낸다.따라서 예술작품이 어떠한 문화 전반을 표현한다는 것은 예술품을 만들어낸 작가의 감성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특히나 다른 가치관을 가진 다른 문화의 관객들이 작품을 대면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신미경의 번역프로젝트는 이러한 창조적인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 작가는 조각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한 번역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조각은 그 자체로서 번역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삶의 요소들을 하나의 형태로 압축해서 보여줌으로써 현실의 한 단면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11월, 제임스 푸트넘,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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